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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산다

분류없음 2009/04/08 21:33


우리나라 사람들 중 '최초'로 북극점을 정복하고,
세계에서 '최초'로 사하라 사막을 도보로 횡단하고,
실크로드를 자전거로 건넌 탐험가 아저씨가 이번에는 무동력 보트로 대서양을 건너겠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기사가 으레 그렇듯 '국내 최초' '세계 최초' 이런 수식이 붙어 있었는데
나는 최초, 최고, 가장, 제일과 같은 최상급의 의미가 담긴 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최초'라는 건 순위 게임을 부추기는 위험한 단어다.
가령, 얼마 전까지 리플에서 많이 발견되었던 일등 놀이를 보면 
등수에 대한 강박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뇌리속에-자연스럽게- 뿌리 박혀 있는지 알 수 있다.

가장 잘하면 좋다.
최초로 해내면 오리지널리티를 인정받고
최고로 잘하면 최고로 대접받는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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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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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저, 해낼 수 있는 만큼, 견딜 수 있는 무게만큼 하면 안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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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가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타협이라는 미명 하에 비겁하게 꼬리부터 내리는 것이다.
살금 살금, 살금, 살 금,   살    금....

그냥, 적당히, 대충, 안 죽을 만큼만.

타협과 혈연 지연 관계를 맺고 있는 이런 단어들과,나 역시 깊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다.
사람과, 시간과, 건강 같은 것처럼
내 의지만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것들이 몸과 마음을 짓눌러온다면
일단은 나부터 살고 봐야 하는 거니까.
무엇이든 다, 살자고 하는 짓일 테니까.

누군가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외롭지 않기 위해 적당히 사랑을 하고
누군가는 혼기가 찼으니까 조건 봐서 적당히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돈 혹은 시간이 없어서 적당히 자식을 키우고
부모에게도, 애인에게도, 친구에게도, 그러니까 다른 모든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도 당연히, 적당히.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건 좀 더 보편적으로 쓰는 부정적인 의미의 적당히가 아니라
인정을 해줘도 될 만큼 긍정적인 의미의, 적당히.
치고 빠져도 될 만큼 쳤을 때의 적당히다.


적당히


1) 정도에 알맞게

2) 비슷하게 요령이 있게

*
나는 적당히 나아갈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더 많이 더 멀리 적당히.
하지만 최고, 최초, 가장, 제일이란 말에서는 자유로워 지고 싶다.
안 그래도 예민한 성격이 '최고' 예민지점에 달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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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위에 말했던 그 탐험가 아저씨, 어찌보면 참 진부한 말이지만
지금은 참으로 멋지게 들리는 말 한 마디를 남겼다. 


"도전을 앞두고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두려워서 떠나지 못한다면 평생 꿈만 꾸다 말겠지요. 날아보지도 않고 날개를 접을 수는 없어요. 바다에서 하루 만에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출발할 겁니다."  - 탐험가 최종열


여섯 살 때, 해수욕장에 갔다가 부표까지 떠내려 간 적이 있다.
그땐 유난히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이 많았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물귀신이 정말로 있다고 믿는 분위기였다.
몇 십년 만에 찾아온 큰 홍수가 저지대에 있던 집이며 논밭을 꿀꺽 삼켰고, 한 집 건너면 아는 사람이 흙탕물에서 퉁퉁 불은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무 타이어처럼 생긴 검은 튜브에 몸을 끼우고 누런 바닷물 위에서 발장구를 치고 있었는데
파도를 잘못 탔는지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내 몸은 해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파도가 키를 넘어 눈코입귀에 물이 마구 들어갔고 콧물보다 짠 바닷물을 연거푸 마시며 숨도 제대로 못 쉬게 되었을 즈음 물 속에서 무언가 발목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억센 손아귀. 물 속에서 올라온 주인을 알 수 없는 손을 떠올리자 머리 끝까지 소름이 돋아올랐다.
몸을 지탱하고 있는 고무 튜브는 부여잡고 있기에 너무 미끄러웠고 내 몸 두어 개는 들어갈 만큼 지름이 너무 넓었다. 
스르르륵- 몸통이 물 속으로 미끄러 들어가면서 이렇게 물귀신에게 잡혀 죽는구나 생각한 순간 무언가 내 목을 칭칭 감았고 그대로 어디론가 헤엄쳐갔다.
비몽사몽간에 바다를 빠져 나와 모래 위에 드러누우니 햇빛을 삼킨 누군가의 실루엣이 검게 보였다. 아버지였다.
뭐라 뭐라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는데 말소리는 귀에 웅웅거릴 뿐이었고 공포감이 너무 심했던 탓인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나는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는 기억만 날 뿐 아버지가 구해준 기억은 전혀 나지 않았다.

***  
시간이 많이 지났고 욕조물 외에는 고인 물과 별 다른 인연 없이 살아왔는데 3월 초, 디스크 예방 차원에서 수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푸른 물. 아주 오래 전 빠져 죽을 뻔한 누런 바닷물이나 사람들의 목숨을 수도 없이 앗아간 장마 황톳물과는 사뭇 다른 때깔을 보였지만 그래도 어깨까지 오는 깊은 물은 몸을 담그자마자 어린 날의 기억을 단번에 불러내었다.
나는 물이 무서웠다. 그것도 엄, 청, 나, 게.
물 속에서 숨을 쉬기는 커녕 몸을 띄우는 것조차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것만 같았다.
접싯물에 코 박고 죽는다고 유아 풀에서 숨쉬기 연습을 하면서 나는 수영장이 떠나가라 어푸, 어푸 소리치며 먹은 물을 토해냈다.
수영장에서 가장 수영을 잘 하는 축에 드는 언니는 창피하다고 목소리 좀 낮추라고 했지만 내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기판을 잡고 발버둥만 칠 뿐 , 숨쉬면서 앞으로 나가는 건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다.
자생력 제로. 숙련도 삐질. 기초반에서도 바닥을 기는 내 폼새에 언니는 혀를 차며 저질 체력이라 놀려댔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수영장으로 향했다. 언니의 오랜 습관 덕분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부지런을 떨 수밖에 없었다. 유아 풀은 이제 내 전용 연습장이 되었다.
언니는 자유 레인에서 자유영 접영 평영 배영에 오리발까지 이용한 갖은 헤엄질을 치고, 나는 유아 풀 바닥으로 하염없이 가라앉은 지도 열흘은 족히 지났을 때,
어라라라? 내 몸이 이상했다. 물 속에서 얼굴을 들고 숨을 내뱉았는데 몸이 가라앉질 않는 거였다.
용기를 내어 발을 찼더니 몸이 부우웅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언니 수영 동호회 사람들이 우- 하고 야유를 보내왔다.
그제서야 그동안의 창피함이 한꺼번에 밀려와 나는 물 속에 고개를 처박았다.
귓속 가득 물이 밀려 들어와 사방이 고요해졌다.
아, 물 속은 정말 평화롭구나. 가라앉지 않기 위해 사투를 벌였던 그 물이었던가 싶게 물이 굉장히 포근하게 느껴졌다. 
포근하게 느껴진 건 사실이지만 뭔가 떠다니는 게 참 많기도 했다.
누군가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살비듬, 그리고 정체 불명의 털들, 그리고 콧물? 가래? 비슷한 점성 물질까지...
아,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살비듬과 그들의 입코에서 나온 무엇무엇들을 들이마신 걸까? 

***
한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제, 물이 너무 더러워서 두렵다.

친구가 그랬다.
나와 함께 있으면 나의 슬픈 파장, 그리고 자신의 슬픈 파장이 섞여들여 굉장히 슬픈 기분이 된다고.

어린 시절, 일상은 균열의 연속이었고 내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갈등은 나를 한없이 안으로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나는 '위축'되었다.

삶은 고만고만하게 힘든 것이고, 누구에게나 겪고 싶지 않은 일 몇 가지쯤은 일어난다.
내 불행은 유난한 것이 아니었다.
표준치, 혹은 표준치보다 아래를 맴돌고 있을 뿐.

나도 안다.
문제는 슬픔 자체가 아니라 슬픔을 대하는 내 포즈에 있었음을.

모든 것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맞고, 또 보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해묵은 습관은 후천적 노력으로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투정 부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지금 이 순간도 그로 인해 마음의 난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 숨을 참고 이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고통스럽게 '견뎌내지' 않아도, 슬픔에 '빠져' 있지 않아도
삶은 어쨌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니
바닥에 떨어져 피를 흘릴지언정 나무에 매달려 있는 동안은
목련처럼 태연스럽게, 흰 낯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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